대강절 셋째 주일은 ‘기쁨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첫째 주에는 긍휼을, 둘째 주에는 평화를 기다렸다면, 이제 우리는 기쁨을 기다립니다.
교회력에서는 이 주일을 가우데테 주일(Gaudete Sunday)이라 부릅니다.
“기뻐하라”는 뜻을 가진 이 날은, 주님의 오심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기뻐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이 초대 앞에서 우리안에 정말 기쁨이 있는지 되돌아 보게 됩니다.
영성가 리처드 포스터는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 오랫동안 자극적인 것에 익숙해져서, 정작 진짜 기쁨이 무엇인지 잊어버렸다.”
이 말은 오늘 우리의 현실을 정확히 짚어냅니다.
우리는 즉각적인 재미와 빠른 만족에는 익숙해졌지만,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깊은 기쁨에는 점점 낯설어졌습니다.
웃고는 있지만 기쁘지 않고, 바쁘게 살고 있지만 마음은 텅 빈 상태로 하루를 살아갑니다.
사실 이것은 오늘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바냐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의 백성들도 같은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죄로 인해 나라가 흔들리고, 심판이 눈앞에 다가오는 현실 속에서 그들은 희망마저 메말라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절망의 한가운데서 하나님은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을 주십니다.
“노래하라. 기뻐하라. 즐거워하라.”(습 3:14-17)
상식적으로 보면 너무 가혹한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기쁨은 상황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에서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먼저 “기뻐하라”는 결론을 말하고, 그 뒤에 왜 기뻐할 수밖에 없는지를 하나씩 설명합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이것입니다.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형벌은 단순한 징계가 아닙니다.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의 근본적인 문제를 뜻합니다.
과거의 상처가 남긴 죄책감, 미래를 생각할 때마다 밀려오는 두려움, 반복된 실패 속에서 생긴 무력감….
우리는 이런 영혼의 무게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형벌을 “제거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도록 완전히 치워버리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평생 씨름하던 죄와 두려움의 짐이, 그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끝났습니다.
그러므로 기쁨은 애써 만들어내는 감정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구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응답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이 말씀은 하나님이 단지 가까이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중심, 존재의 한복판에 거하신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바깥을 맴도시는 분이 아니라, 가장 연약하고 숨기고 싶은 자리까지 기꺼이 들어오시는 분이십니다.
마지막으로 17절은 기쁨의 절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며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고, 잠잠히 사랑하시며, 우리를 향해 노래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조건을 따져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스바냐 3장의 말씀은 절망의 한가운데서 들려오는 가장 강력한 복음입니다.
기쁨의 근거는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이미 우리 가운데 오신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약속에서 흘러나옵니다.
이번 한 주도 이 약속이 우리의 가장 깊고 흔들리지 않는 기쁨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